우리 타선이 두번째 투수로 나선 쿠바의 마무리 페드로 라소까지 조기 강판시키는 동안에도, 21살의 투수 류현진은 1번부터 9번까지 모두가 4번타자같았던 쿠바의 타선을 담담하게 상대하며 8이닝까지 굳건히 마운드를 지키고 있었다.
쿠바의 마지막 공격이었던 9회말. 감독은 구질이 떨어지지 않았던 류현진을 계속 마운드에 세웠다.
원아웃에 주자 2루. 불안한 상황이었다. 안타하나면 동점. 그리고 쿠바의 찬스는 이어질 것이다.
하지만, 류현진은 담담하게 공을 던졌다.
볼넷.
류현진의 볼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문제는, 실재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실재하는 마법의 공간, 스트라이크 존이었다.
야구에는 타임아웃도 없고, 셋트 제한도 없다. 그리고, 선을 벗어났다고 아웃되는 경우도, 어지간해서는 없다. 야구에서 눈에 보이는 선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승부를 결정 지을 정도로 중요하지 않다. 야구에서 가장 중요한 선이 있다면, 그것은 스트라이크 존을 만드는 보이지 않는 선이다. 그런데, 이 선이 심판의 재량에 따라 좌지우지 되니 자주 시비가 인다.
바깥 쪽이나 안쪽, 그리고 타자들이 치기 어려운 낮게 깔리는 공일 경우라면 두말하면 잔소리다.
류현진의 바깥쪽 구석을 찌르는 슬라이더와 낮게 깔리는 공은 경기 내내 볼과 스트라이크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공략했다. 그만큼 제구가 완벽했다는 뜻이다.
8회까진 별 문제 없었다. 프로야구보다 다소 넓은 아마츄어 야구의 스트라이크 존이 오히려 우리에게 유리한 듯 보였다. 그런데, 9회말에서 갑자기 심판이 돌변했다. 9회초 한국의 공격에서는 번번이 스트라이크 판정이 났던 그 곳에 류현진의 공이 들어왔지만, 주심은 계속 볼을 선언했다.
또다시 볼넷. 연속 볼넷이었다. 류현진의 첫 위기이자, 한국팀의 결정적 위기였다. 1사 2루에서 두 개의 볼넷으로 주자는 만루가 됐다.
류현진의 얼굴이 굳었다. 이렇게 되면 점수를 주는게 문제가 아니었다. 안타 하나면 역전으로 게임이 끝나는 상황이다.
설상가상으로 중계 화면의 프레임 밖에서 문제가 생겼다.
갑자기 강민호가 퇴장을 당했다. 계속되는 어이 없는 볼 판정에 항의했다고 퇴장이라니. 9회말 1아웃 만루에서 볼 판정에 이의를 제기했다고 포수를 퇴장시킨다는 건 작정하고 그 팀을 물 먹이겠다는 의미다.
코칭스탭이 나서서 중재를 해보려고 했지만, 판정은 번복되지 않았다. 강민호는 미트를 있는 힘껏 집어던지고 덕아웃 안쪽으로 사라졌다.
이대로 끝나는 건가...
너무나 억울했지만, 우리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한국의 주전포수였으나 허벅지부상으로 어린 강민호에게 포수자리를 넘겨주었던 백전노장 진갑용이 다시 미트를 집어들었다.
그에게 있어 이번 올림픽은 마지막 올림픽이 될 것이다. 아니, 야구라는 스포츠에 있어서도 이번 올림픽이 마지막 올림픽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는 묵묵히 마스크를 썼다.
포수교체와 동시에 투수도 교체됐다.
괴물투수 류현진의 기대이상의 호투가 아니었다면 진작 마운드에 올라갔을 마무리투수 정대현이 등판했다.
마무리투수에게 고독은 숙명같은 것이다. 그의 뒤엔 아무도 없다. 승패가 올곧이 그의 어깨에 달려 있다. 막으면 팀의 승리, 지면 모든 걸 덮어쓴다.
마지막 올림픽 야구, 그 마지막 경기. 한국의 사상 최초의 야구 금메달이자, 마지막 야구 금메달이 정대현의 어깨에 걸려 있었다.
그 때 마운드를 밟고 선 정대현이 어떤 생각을 했는지는 그 자신만 알고 있겠지만...
나는 보았다. 정대현의 얼굴에 미소가 스치는 것을.
정대현은 표정이 없는 투수다.
표정 없는 걸로 치자면 오승환과 견줘도 결코 뒤지지 않는다.
그런 정대현의 얼굴에 여유롭게 미소가 감돌다니. 9회말 1사 만루에 마운드에 올라선 마무리 투수의 얼굴에 어울리지 않게 미소라니...
선발투수로 나왔을 때와 별로 다르지 않았다.
침착하게 와인드 업...
정대현의 첫공이 진갑용의 미트에 경쾌하게 빨려 들어갔다.
빠른 슬라이더.
조금 높았다 싶은 공이었지만, 심판은 스트라이크를 선언했다.
퇴장을 불사한 강민호의 항의 때문이었을까?
그렇다면 심판도 긴장했다는 의미. 해볼만 하다.
어쩌면 1점만 내주면서 동점으로 끝내고, 연장으로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희망이 싹터올랐다.
두번째 공.
역시 슬라이더.
볼이 살짝 가운데로 몰렸는데 쿠바의 타자 구리엘은 배트를 휘두르지 않았다.
투 스트라이크!
운이 좋았다. 정대현은 당황하지 않는 것 같았다.
하나면 된다. 스트라이크 아웃 하나면... 그러면 추가 실점 없이 이길 수 있는 경기가 됐다.
조급하게 하지 말고 공 하나 둘 정도 빼보고...라는 생각을 하는 찰나,
정대현의 세번째 공이 뿌려졌다.
그 뒤부터, 나는, 시간이 사실은 공간처럼 휘어져 있다는 걸 내 눈으로 확인했다. 내 눈이 알아서 슬로우모션으로 상황을 포착해 나갔다.
타자의 바로 앞에서 뚝 떨어지는 정대현의 공에 구리엘의 배트가 나갔다.
어설프게 배트에 맞은 공이 정대현의 옆으로 빠르게 굴러 갔다.
유격수방면...
올림픽이 시작된 후 단 한 개의 안타도 못치다가 마지막 경기에서 중요한 안타를 친 한국 최고의 유격수 박진만이 유격수 수비의 정석처럼 대쉬하며 공을 잡았다. 그리고, 이익수 혹은 고제트로 불리는 한국 최고의 2루수 고영민에게 한치의 오차도 없이 자로 잰 듯 공을 뿌렸다. 스텝을 밟으며 부드럽게 공을 캐치한 고영민이 2루 베이스를 밟고는 다시 그 공을 한국의 4번타자이자 한국 최고의 1루수였던 이승엽에게 송구했다.
1루심이 아웃을 선언하기도 전에 이미 이승엽은 공을 쥔 손을 높이 치켜들며 뛰어나왔다. 너나 할 것 없이 구장으로 뛰어나온 선수들이 눈시울을 붉히며 서로를 부둥켜 안았다. 퇴장당했던 강민호는 아이처럼 엉엉 울며 형님들을 얼싸안았다.
3대2 한국의 승리.
누구도 우승을 점치지 않았던 한국이
9개의 게임을 모두 승리로 이끌며 승리.
단 한 차례도 요행을 부리지 않았고,
언제나 승리하기 위한 게임을 했으며,
끝까지 위기에서 주저앉지 않았던 한국의 야구팀이
마지막 올림픽 야구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이것을... 기적이라고 불러도 좋다.
만약 당신이,
투수가 공을 던지기 직전
그 침묵의 시간에 오가는 들리지 않는 수많은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그렇다면, 당신도 기꺼이 야구를 즐길 수 있을 것이다.
당신 안에 숨어 있는 소년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타임아웃 없는 경기의 묘미를 즐길 수 있다면,
어딘가에 기적은 있다고 믿고 있다면,
공은 둥글고, 지구도 둥글고,
세상도 야구도 결국엔 인간의 의지로 움직인다는 걸 믿고 있다면...
... 그렇다면 당신도 야구를 좋아할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