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제는 <천수위의 밤과 안개>. 허안화감독이 홍콩의 재개발지역인 천수위를 배경으로 만든 <천수위의 낮과 밤>의 속편격인 영화란다. 하지만, 두 영화가 내용상으로 이어지는 건 아니라고. 설명에 따르면 전작은 훈훈한 멜로드라마라고 한다. 아마도 한 도시의 양면성을 그리려고 했던 모양이다.
GV에 온 포기정의 말에 따르면, 홍콩의 나이 든 남자들이 중국 시골마을의 젊은 처녀와 결혼해서 천수위에 사는 경우가 많다고.
영화는 어느 가장의 일가족 살해사건으로 시작한다. 행복해 보이는 가족사진 속 이들이 어떻게 이런 비극적인 상황에 이르렀는지, 다른 이들의 증언을 매개로 이들의 과거가 소개되면서 한 겹씩 한 겹씩 그 진실이 드러난다.
홍콩남자에 대한 환상을 갖고 대륙에서 온 '링(포기정)'이나 임달화가 연기한 홍콩남자의 모습 모두가 익숙한 장면들이다. 한국 남자와 결혼한 베트남의 젊은 여성들, 혹은 연변, 혹은 그 어떤 곳이라도... 고스란히 복사판이다. 한국 남자와 결혼해 한국에서 행복하게 살겠다는 꿈 많았던 베트남 여성을 무참히 살해한 한국 남자들의 이야기와 다를 바 없다. 한국 관객들에게는 이런 익숙함이 오히려 영화를 영화로 보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처럼 느껴질 정도.
허안화감독이 선택한 이런 배경은 사실 이야기에 현실성을 부여한다기보다 관계를 도식화시키고 이야기를 상당 부분 가둬두는 역할을 한다. 이 영화는 과연 천수위라는 도시에서 일어날 법한 현실적인 이야기-가정폭력을 고발한 영화일까?
각본이 좋다고 하기는 좀 그렇고, 연출은 멜로드라마적 감성을 표출하는 부분에선 좀 간지럽고, 비정한 장면에서 오히려 힘이 느껴진다. 간혹 감정에 겨워 울분에 차서 고발하고 내지르고 싶은 충동에 휩싸인 것처럼 보일 때는 상당히 위태롭다. GV에 온 포기정에 의하면, 허안화감독은 너무나 겸손해서, 현장에서 자신이 갈피를 못잡고 흔들리는 상황이 오면 잠시 나갔다 들어와서 배우와 스탭 모두에게 "죄송합니다. 제가 잘 몰라서 그랬습니다"라고 사과를 한 후 상황을 정리하고 촬영을 재개했다고 한다. 노장의 그런 겸손하고 합리적인 태도가 참 존경스럽다. 그리고, 영화는 참 정직해서.. 그런 흔들림이 가감없이 담긴다는 것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
임달화의 연기는 징그러울 정도. 처음엔 사람 좋은 서민같은 인상을 주던 남자는 영화가 진행될수록 포악함을 드러낸다. 자존심 때문일 수도, 나이 들고 하는 일 없는 남자가 갖는 불안함 때문일 수도, 원래 이런 남자였을 수도 있다. 단 한 번도 연민의 정을 줄 틈을 주지 않을 정도로, 참으로 끝까지 혐오스럽기만한 인물을 어찌나 생생하게 연기해내는지. 다시 생각해봐도 소름이 쫙 쫙 끼친다.
포기정은 연기도 좋았지만, GV에서 어찌나 품위 있고 성의 있는 태도로 관객들의 질문에 대답해주는지.. 매우 호감. 한국의 여배우 중 과연 누가 혼자 GV를 찾아 관객들과 대면해 불편한 질문에 하나 하나 성의 있고 세심하게 대답해줄 수 있을까. 뭐, 문소리 정도가 가능할까?